대만문제의 유래
2005-03-20 00:00

 

중국전국인민대표대회는 일전에 극히 높은 표수의 표결로 [반국가분열법]을 통과했습니다. 이는 양안관계발전을 촉진하고 양안의 평화통일을 추진하는 법률입니다. 이 법률의 출범은 대만문제에 대한 국내외 각계인사들의 관심을 재차 야기시켰습니다.

그럼 계속해 대만문제의 유래와 대만문제 해결에서의 중국정부의 기본 주장과 사고방식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대만문제의 산생은 1949년에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똑똑히 밝히려면 또한 제2차 세계대전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 당시 중국공산당은 일찍 중국국민당과 손을 잡고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대와 싸웠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과 중국의 항일전쟁이 결속된후 장개석을 위수로 하는 중국국민당은 중국공산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하는것을 거절했으며 1946년 내전을 발동해 중국공산당을 소멸하고 일당 독재의 정권을 건립하려 시도했습니다. 3년간의 전쟁을 거쳐 군사상에서 열세에 처했으나 인민들의 지지를 얻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패배시켰습니다.

1949년 10월 1일 승리를 이룩한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했습니다. 그후 얼마 안되여 국민당세력이 중국 대륙에서 전면 패배해 중국 동남부의 대만섬으로 퇴각했습니다.

대만은 예로부터 중국 영토의 한 부분이며 대만섬과 중국대륙은 하나의 해협을 사이 두고 있으며 양안간에 제일 가까운 곳은 130킬로미터밖에 안됩니다. 국민당이 대만성으로 퇴각한후 미국의 지지하에서 계속 중국의 합법적인 대표로 된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항했습니다. 이로부터 대만은 중국대륙과 분리상태에 놓이게 되고 지금까지 이미 56년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만문제를 해결할데 대한 중국정부의 결심은 일관합니다. 그러나 문제해결의 방침은 수십년간에 역시 일부 변화를 보였습니다. 1979년 이전에 중국정부는 줄곧 무력으로 대만을 해방할것이라고 표시했으며 당시 양안은 완전히 단절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1979년이후 중국정부는 극력 평화의 방식으로 양안문제를 해결할것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대만섬내의 분열세력들이 대만을 중국에서 분열하려는 동향과 외국세력이 중국의 통일에 간섭하려는 시도에 대비해 중국정부는 또한 무력 사용에 의한 통일 실현을 포기하는것을 승낙지 않는다고 표시했습니다.

최근 중국 호금도국가주석은 양안관계발전에 관한 4가지 의견을 제기했습니다. 즉 하나의 중국원칙을 견지하는것을 절대로 동요할수 없으며 평화통일을 쟁취하는 노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며 대만인민에게 희망을 두는 방침을 관철하는것을 개변하지 않으며 "대만독립"분열활동을 반대하는데서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것입니다. 그는 대만동포에게 이로운 일이고 양안교류에 이로운 일이며 대만해협의 평화에 이로운 일이고 조국의 평화통일에 이로운 일이라면 국가는 모두 최대의 노력을 들여 처사하고 또한 반드시 노력해 잘 할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는 대만의 광범한 동포에 대한 국가의 장엄한 승낙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최고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일전에 높은 표수의 표결로 [반국가분열법]을 통과했습니다. 이 법률의 출범은 양안관계의 발전을 추진하고 중국의 평화통일을 촉진하며 "대만독립"의 분열세력들이 국가를 분열하는것을 반대하고 억제하며 대만해협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데서 중대한 현실역할과 심원한 역사적 영향을 산생할것입니다.

최근 한시기 대만해협정세에는 일부 완화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대만실업가 음력설 전세기가 이미 실현되고 대만농산물이 조국대륙에서 판매되는 문제도 진전을 이룩했습니다. 중국대륙측은 계속 조치를 취해 양안경제관계를 밀접히하고 교육, 과학기술, 문화, 보건, 체육 등 측면에서의 양안간의 교류와 협력을 격려하고 추동할것이며 양안관계의 평화발전의 밝은 전망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할것입니다.

                                                 ( 중국국제방송,번역편집:김금철 )